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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하루종일 놀라움과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15년 전 어학연수로 4개월 동안 미국에서 지낼 때 체감했던 그 당시 한국의 위상을 회상해보자니
BTS 다음으로 동시대에 사는 걸 감사하게 만드는 분입니다.
한편 한강 작가의 해외 진출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Deborah Smith 입니다.
자칫 이 능력 있는 언어 오타쿠와 탁월한 소설가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2024년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Deborah Smith는 1987년생 영국인으로 (저랑 동갑!)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번역가의 꿈을 품고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어를 고른 이유로는 충분히 현대 선진국의 언어이면서도 희소성이 커서 학비 보조금 및 추후 일감을 얻을 때 유리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화끈한 진로 선택이네요)
이후 런던 대학교의 한국학 박사 과정 동안 <채식주의자> 번역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가 한글을 공부한지 고작 3년 되던 때였습니다.
원본을 읽고 이 작품에 반해버린 그가 1년 뒤 직접 영국 출판사에 책을 소개하며 번역을 제안한 결과였습니다.
이 계기로 둘은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한강 작가는 Deborah의 영역을 창의적 & 예술적 작업으로 존중하며 영어 번역서를 가리킬 때마다 '우리 책'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할 당시 정작 원작자는 평화로운데 번역가인 Deborah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죠.
그가 한국어를 시작한 지 6년만에 이룬 쾌거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재능 넘치는 번역가에게도 고단한 시기가 있었는데,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 후 출판사에 독자들의 오역 지적이 수백 건 넘게 들어왔고 결국 60여 곳을 수정하여 재출판했던 겁니다.
당시 독자건 식자건 번역가를 향한 인신공격적 비난이 칼럼과 SNS를 통해 무수히 쏟아졌다고 합니다.
번역 후 언어가 영어가 아니었더라면, 또는 괜히 일 잘 해서 큰 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됐을 마음 고생이었을 겁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왜 이리 영어라면 버튼이 눌리는 걸까요?)
저는 잠시 영상 번역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OTT 플랫폼 Watcha에서 <Dexter>라는 작품을 일부 번역했습니다)
팀으로 일하는 번역가들끼리의 끝도 없는 오역 지적과 한국어 자막 규칙의 엄격함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만두었습니다.
개별적으로 일하는 환경을 찾아 경력을 계속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번역이 보이는 것보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랍니다...!
Deborah의 과거 인터뷰 중 한 구절이 인상 깊어 발췌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어를 학습하는 건 쓸모있고 즐거운 행위이며, 현대인이 모국어 하나밖에 할 줄 모른다면 창피한 일인 겁니다.
이 말은 즉
지금 우리 학원에서 외국어를 공부하는 여러분들은 참으로 실속적이고, 인생을 즐기는 기쁨을 알며, 어디 내놔도 창피하지 않은 분들이라는 거죠.
하지만 현실은 많은 수강생들이 자신감을 잃은 상태로 수업을 시작하고 기술적, 정신적 난관을 동시에 느끼며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강생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목표를 이뤄드리는 보람을 누릴 기회가 많았습니다만 (어학점수 획득, 인터뷰 통과, 이민 성공 등)
사실 근본적인 언어 공부의 고통을 완전히 해소하고 수업을 종료한 사례가 지금까지 있기는 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나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언젠가 원어민처럼 말하는 날이 오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늦은 나이에 영어회화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이건 부질없는 동시에 올바른 목표 또한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저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을 정도의 '정확도'와 내가 답답하지 않을 정도의 '신속함'을 '내 속도'에 맞춰 꾸준히 개발하는 것이 최선이고 최고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속으로 자학하는 순간이 있는 걸 보면 저 또한 언어 공부의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 한 것 같습니다.
회화 공부는
자신과의 싸움인 동시에 (남이 떠먹여줘도 입에 잘 안 들어옴)
타인의 평가를 차단할 수도 없고 (의사소통엔 반드시 두 명 이상이 필요하므로)
결승선마저 없는 (아무리해도 난 평생 외국인)
이상한 마라톤과 같습니다.
'나 왜 이렇게 못하지?'라는 생각이 들 땐 '난 이미 충분히 잘 해. 됐고 그냥 한번만 더 노력해보자.'라고 바꿔 생각해 보세요.
제가 늘 강조하는 공부법을 평소에 꼭 실천하시고, 혹여 그게 취향에 안 맞으면 나만의 평생 공부법을 개발하셔야 합니다.
이 경기를 포기하는 대신에 한번만 더 달리는 척 해보는 거예요!
Deborah의 노고 덕분에 훌륭한 작가가 세계 무대에서 빛을 발하는 걸 보니 새삼 언어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며,
우리 수강생분들도 영감을 받아 덕력을 더 키워서 영어회화 공부에 정진할 수 있는 남은 한 해가 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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